“황금 왕관을 쓰고 빨간 뷔스티에와 파란 팬티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빨간 부츠를 신은 원더우먼. 그녀는 우아한 변태였다.”
원더우먼의 역사는 페미니즘을 떼어놓고 말할 수가 없다. 마거릿 생어,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의 역사에 남을 페미니스트들은 원더우먼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원더우먼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한 인물들이다.
이 책은 원더우먼의 탄생과 변화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원작자인 윌리엄 마스턴의 비밀스런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성공에 집착하는 무명(에 가까운) 심리학자였던 윌리엄 마스턴은 출판사에 슈퍼맨의 자문 역할로 들어갔다가 원더우먼을 집필했다. 아마존을 떠나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원더우먼의 설정은 당시 시와 소설에서 흔하게 사용되던 소재였지만, 마스턴은 원더우먼에서 “페미니즘을 무기삼아 파시즘에 맞서고자” 했다.
그때 캡틴 아메리카가 막 등장한 시기였으므로, 의상에 성조기를 집어넣었다.
1911년 시작된 미국의 여성 인권(참정권) 운동은 현재의 우리와 닮아있다. 페미니즘은 사회악으로 여겨지고 대중적인 매체에서 다뤄지거나 공공장소에서의 강연이 금지되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원더우먼은 등장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슈퍼맨과 배트맨을 제외하고는 어떤 히어로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원더우먼은 여자 어린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놀랍게도 20대 이상의 성인남녀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원더우먼은 독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오브 아메리카>에 들어갔지만, 이 시리즈의 작가였던 가드너 폭스는 원더우먼을 비서로만 써먹으며 거의 등장시키지 않았다.
코믹스는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당연하게 퍼져 있었으므로 수시로 많은 검열과 비판을 받아왔다. 배트맨이 총을 쓰지 않는 캐릭터가 된 것은 당시 미국 내의 총기규제와 민간인과 군인의 역할을 구분 짓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 여성참정권론자들이 철책에 스스로를 쇠사슬로 묶은 사건을 기억하는 마스턴은 원더우먼이 남자로부터 쇠사슬에 묶이면 약해진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물론 아마존들이 헤라클레스 때문에 쇠사슬에 묶인 노예가 된 것도 관계가 있지만. 원더우먼이 올가미로 묶고 넓은 팔찌를 차는 것, 등장인물의 설정 등은 모두 마스턴의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다.
노출과 결박이라는 소재가 페티시 등으로 보이면서 레즈비언과 폭력적인 SM을 조장한다고 지탄을 받으면서도 그 고집을 꺾지 않고 유지했다.
마스턴은 페미니스트인 뛰어난 여성과 결혼했지만 한 명의 여성으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바람을 피웠고, 나중엔 또 다른 여자와도 사귀어 세 여자와 한 집에서 함께 살았다.
마스턴은 여성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원더우먼에서 페미니즘 요소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정작 본인은 변태적 행위를 즐기고 아내와 애인을 이용하고 부려먹은 그런 남자였다. 그가 세 여인과 함께 산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날 정도이며, 아내와 애인은 마스턴 때문에 본인의 커리어들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성이 일하기 힘든 사회상 탓도 있었지만.
마스턴은 거짓말 탐지를 개발해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거짓말 탐지기법을 처음 도입한 것은 마스턴이지만, 그것을 기술로 발전시켜 장비를 실용화시킨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마스턴의 이 발명은 거의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쇼를 하고 사기를 치며 살았다. 거짓말 탐지로 성공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며 살아온 셈이다.
마스턴과 아티스트, 편집자 등이 모두 죽거나 떠난 뒤, 원더우먼은 페미니즘을 잃고 수준이 떨어져버렸다. 사랑을 갈구하는 멍청한 여자가 되었을 뿐더러, 심지어 초능력을 잃고 보통 사람이 되어버렸다. 페미니즘 운동도 꺾였다.
70년대에 다시 페미니즘이 성행하면서 원더우먼의 인기가 다시 솟았지만, 여전히 남자 작가와 편집부는 엉망으로 다뤘고, 미인대회 출신의 린다 카터가 드라마에서 원더우먼을 연기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역행하는 내용을 선보였다.
어느새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어버린 원더우먼을 내세워 페미니즘 행사를 후원한 곳은 워너였다. 지금은 DC 코믹스가 워너의 계열사가 되었으니, 원더우먼이 워너와 DC 코믹스 사이의 교집합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원제는 <원더우먼의 비밀스런 역사>로, 페미니즘에 관련해서 국내에서 제목을 잘 바꿨다는 생각이 든다.